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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COUNTRY FOR WICKED

녹음의 녹음

2022. 7. 1.

 

 

『 미필적 추방령 』

Ben E. King - Stand by me



[ 은화30닢무한제공거짓말사건 ]
안 뤼카 & 미엘르 에피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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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 감사하지 않아. 아무리 악착같이 나아가도, 네가 닿지 못한 이 세계의 절반은 널 비웃기라도 하듯 도로 곪아버리고 있잖아.
그런 삶을 이어가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 거야? 난 도무지 널 알 수가 없어…….


미필적 추방령
NO COUNTRY FOR WICKED



넌 그렇게 살면서 아무 불만 없어?

묻는 말이 무상하다. 창가를 내다보는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돌아오는 답에 관심이라고는 추호에도 없음이 명백하다. 창을 투과해 드나드는 맑은 빛도, 협탁 위를 장식한 단정한 꽃다발에도. 하물며 무릎 위에 분해된 채 얹힌 권총 한 정에도 그는 관심이 없다. 그건 필시 돌아올 답을 예견하여 어떠한 기대도 갖지 않은 탓이다.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푸르게 창백한 손끝을 끌어 무릎 위 얹힌 쇳덩이를 무심코 매만지기만을 반복할 뿐이다. “계속 그렇게 살아도 괜찮냐고.” 답을 종용하는 소리에 미엘르는 길지 않은 침묵을 깬다. “어떻게 말인데. 안?” 일방적인 질문을 대화의 방향으로 틀어 꺾으며 미엘르가 웃는다. 근래 두 사람의 대화는 소모적인 흐름을 지니기 십상이었고, 체력적 한계로 피로를 호소함에 앞서는 것은 미엘르가 아닌 그였다. 이번만치 다를 것은 없으리라. 미엘르는 그가 단지 이런 형식으로나마 대화의 틈을 벌리는 것에 기뻐하며 그의 대꾸를 기다린다. 다소 퉁명스럽고, 분명 날이 섰을 테다…….

“남 인생에 행복 의탁해서 사는 거.” 그게 진짜 기쁜 건 아니잖아. 예상을 뚫지 못하고, 그가 범위 내의 날카로운 소리를 내놓는다. 트집을 잡고 싶은 눈치가 역력하나 예리하게 와닿진 못한다. “또 그런 말이야. 전에도 얘기했는걸. 안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아니라고 했잖아.” 세계가 바로잡아질 수 있으면 그걸로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몇 번을 꺼냈는지 모를 말을, 미엘르는 다시금 여상스레 입에 담는다. 말을 이어가며 명백히 작은 손이 권총을 능숙히 조립해 맞춘다. “그러니까 난 괜찮아.” 얇은 실로 패턴을 짠 레이스가 가볍게 남의 손등을 간지럽힌다.

안은 투명한 창에 맞부딪혀 비친 미엘르의 표정을 보며 익숙히 떠올리던 생각에 잠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앳된 미소다. 세상의 모든 잘못을 직접 뿌리 뽑을 수 있으리라 맹신하는 자의, 단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이는 깊이 얕은 웃음이다. 미엘르의 의중이 진실로 어떠했는가는 안에게로 와 그리 중요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 뜻이 어떠한가는 애초에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안은 늘 미엘르를 탐탁잖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언젠가 그러했듯 어딘가에서 속절없이 휘둘릴 이처럼 미엘르를 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그 인지만은 변하지 않았다. 정정해 주지 않은 오류를 기반으로, 산 사람이 아닌 투영된 피사체를 응시하며, 안은 막연히 미엘르를 향해 못 미더운 심정을 품고 살았다. 미엘르의 〈괜찮다〉는 말은 아득하게 들리는 기질이 있었다. 그 스스로 말을 통해 마음을 다잡고 있기라도 하듯. 결국 불안을 떠안는 것은 그 곁의 인간임을 잊은 것처럼.


그의 정적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 모를 일로, 미엘르는 쥔 것을 내려두고 침대맡에 몸을 정돈해 도로 앉는다. 여러 겹의 얇은 천을 덧댄, 드레스 자락의 숨이 모서리에 눌려 희미하게 죽는다. 미엘르는 개의치 않는다.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다시 자주 묻더라. 무슨 일 있었어?” 선택하는 단어는 상냥하고, 말은 부드러운 형태를 지녀 어르는 듯한 형체로 묶인다. 그것이 짐짓 마음에 차지 않은 사람처럼, 안이 한참만의 외면을 깨고 낯을 마주한다. 하얗게 질린 피부 아래로 짙게 찬 병증이 또렷하다. “그런 거 아냐.” 여기서 무슨 일이 있겠어.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일뿐인데… 옅은 눈을 마주하며 미엘르는 짐짓 흐름을 돌파할 구석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런 뜻 말고. 난 혹시라도.” 문장은 완결되기 전, 절반을 탈취당해 빼앗긴다. 안이 지친 낯으로 자른 말허리가 허공에 어색하게 뜨고야 만다.

“아니야, 없어. 아무 일도… 신경 안 써도 돼.” 미엘르가 난처한 기색으로 미간 사이를 희미하게 찌푸린다. 눈썹 끝이 아래로 미약하게 떨궈졌다 돌아온다. “안, 나는…….” 걱정이 돼서 그래. 입원한 뒤로 줄곧 우울해하고 있잖아. 조심스러운 말에 거짓은 없다. 미엘르의 걱정이나, 그에 동반되는 얕은 불안에. 어느 시점부터 안이 그에게 가시적인 우울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도. 모든 것이 미엘르에게는 투명한 것으로 보인다.

“신경 안 써도 돼.”
“그렇게 말하면서 신경 안 쓰이게 한 적 없잖아. 안은.”
“…….” 얄팍한 침묵이 공백을 메운다. 반틈 늦은 대꾸는 기운 빠진 것이다.

“웃긴다. 너. 어차피 신경 쓸 여유 없잖아.” 그가 의사로부터 침울한 선고를 받은 것은 반 년이 조금 넘어간 일이다. 맑고 더운 날이 무책임하게 이어지는 절기에, 병원 독실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의 정서가 안정적일 리 없다. 미엘르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만큼은 투명히 인지하나, 동시에 안의 우울과 자신 사이에선 어떠한 연관성 하나 찾아내지 못한다. 하여 그를 불쾌히 짓누르는 감정은 미엘르의 그런 태도로부터 기인함을, 미엘르는 애초 알 수가 없는 구조가 된다……. “그런 것보단 더 바쁜 일이 널렸으면서.” 안이 눈가를 찡그린다. 등진 햇볕이 눈부실 리 없으니 명백한 부정의 신호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기운 없는 중얼거림이 발돋움을 대신하듯, 그가 한숨처럼 비약을 내뱉는다. “적어도 여기선 내 비위 맞추는 말을 해줘도 되는 거 아냐?”

병실에선 그래도 되는 거잖아. 네가 손해 볼 것도 없으면서. 어차피 결국… “넌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할 거면서.” 터트린 듯한 말에 미엘르의 낯에 옅은 당혹이 서린다. “내가 정말 네가 괜찮은 지가 궁금하겠어?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고 다 넘길 수 있는 줄 알지. 난 그냥. 나는…….” 꼭 그게 너여야 하는지가 묻고 싶은 건데. 안은 남은 말을 뱉는 대신 말라붙은 입술을 짓누른다. 어떤 설득과 부탁, 투정과 화로도. 그 자신만으로는 미엘르를 멈출 수 없음을 깨달은 지가 오래다. 그 아닌 어떤 누구의 애원으로도, 계도하고자 하는 미엘르의 뜻은 꺾을 수가 없다.


안은 그것이 사무치게 억울하고, 약간은 분했다. 세상천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싫었음이 첫째였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철없는 사감을 털어내고 나면 남는 마음은 보다 오롯했다. 안은 단지, 미엘르를 잠시라도 좋으니 그의 곁에 멈춰두고 싶었다. 그 홀로 온전히 감당해야 옳을 부채감을 덜어내고 싶었다… 하여 문득, 시간이 부족하다는 감각을 쥐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 된다. 작금의 순간에조차 불안한 숨소리는 그의 것이다. 꺾이듯 숙여진 시야각에 부드러운 손길이 파고든다. 멍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을 붙잡아 쥔다. “안.” 눈치를 살피고 있으매 분명한 음성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또 화가 난 거야?” 물음은 조금 기가 죽은 채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태도에, 안은 답하지 않는다. “안, 난 모르겠어. 한 번도 그런 이야긴 해본 적이 없잖아. 나는 안이, 괜히 나를 걱정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안심을 시켜주려면, 괜찮다고. 난 정말로 괜찮았으니까…….” 하나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말에, 결국엔 지겹다는 듯이.


“미엘르.”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넌 몰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이번 여름이 지나는 걸 다 못 볼지도 몰라. 안은 결국 꺼내고야 만다. “넌 그런 걸 다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난 지긋지긋한 여름 중에 죽을 거야. 죽는다는 게 뭔지. 그 자체만은 너도 알고 있잖아.” 일그러진 표정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 가지 않는다. 미엘르는, 흐려진 개념을 회상하듯 힘겹게 반문한다. “왜 그렇게 말해? 괜스레 먼저 확실시할 필요 없잖아.” 난 안 믿어, 안… 턱없이 낙천적인 말이 조잡한 형태를 갖춘다. “…언젠 네 믿음이 맞아떨어진 적이라도 있어?” 안은 참지 못하고 뱉고야 만다. “내가 또 언제는, 죽을 거라고 이야기 한 적 있었고?”

지겨워. 정제되지 않은 언어는 상처 입히기 위함을 목적시하고, 안은 그것이 실효를 보는가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뱉는다. “네게 잘 해주고 싶었어. 그만한 짓을 했으니까.” 산 동안은 열심히 살고 싶었고, 네게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싶어서… 목소리가 가늘어진다. 울음보다는 호흡의 부재에서 오는 생리적 반응이다. “그게 네겐 별 의미가 못 되나 봐.” 난 그게 싫었어. 알아? 소리는 갈라지는 소음에 가깝다. 귀를 기울이면, 종내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만다. “네가 사랑하는 세계에, 내가 조금의 자리라도 차지하고 있다는 기분이.” 이제 와서는 도무지 그런 마음이 들지가 않는다고…….

입술이 달싹이는 사이로 이명이 흐른다. “안.” 미엘르가 무어라 변론을 펼치는 것을, 안은 병든 것들의 특권으로 거절하고야 만다. “아니었다고 해도 이젠 됐어.” 앞으론 오지 않아도 좋아. “…안!” 어차피 곧 다시 바빠지실 텐데, 괜한 사람한테 시간 낭비 말아… 미엘르는 외치고, 안은 듣지 않는다. 세 호흡이 공유되고, 형편없는 언쟁이 멎는다.


“왜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미엘르가 망연히 묻는다.

그는 더 답하고 싶지 않다는 낯을 하고서, “말했잖아.” 하고 마지막이 될 물음에 응한다. “넌 세계를 너무 사랑해.” 누굴 위한 것인진 중요하지 않아. 지금의 넌 세계에 목매달아 살고 있잖아. 그 일부에 분명 내가 있는데, 넌 우릴 위한다면서 늘 등을 보여줘서, “난 외로울 때 네가 여기 앉아 있었으면 했어. 미안하다는 사과와 부재중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제 네겐 미안하지도 않아.” 내 빈약한 마음이 더 노력할 수가 없어.

넌 정말 너무한 사람이야. 이 정도면 됐어. 더 연연하지 않을래.

“너도 내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지? 애초에 이렇게까지 애쓸 필욘 없었다 하겠지.” 처음부터 내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면서… 안의 목소리가 흩어진다. 그는, 이제 더는 어떤 물음도, 답도, 해명과 설득도, 부탁과 붙잡음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믿는 사람처럼, 마른 팔을 들어 문을 가리킨다. “이젠 더 보기 힘들겠네.”


“네가 돌아오면 난 여기 없을 거야.” 네가 지키는 세계에, 네가 사랑하는 세상에, 이제 내 몫은 다신 없어서… 이번 여름에 나 하나만큼의 세계는 사라지고 마는 거야. 안은 남은 말을 삼키고, 단어에 긁힌 것처럼 쓰린 목을 울려 뱉는다.
“나가면서 전축에 바늘이나 올려줘.”
“죽을 땐 좋아하는 노랠 틀어두고 싶거든.”

 

 

If the sky that we look upon Should tumble and fall
Or the mountains should crumble to the sea
I won't cry, I won't cry, no, I won't shed a tear
Just as long as you stand, stand b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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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무너져내리는 날입니다. 여름의 끝자락.

당신은 어느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창공과 노을의 경계를 바라보며

낡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곡이 끝날 때 당신도, 당신의 세계도,

그 사람의 세계도 종말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