錄音
Top

永遠梅雨

녹음의 녹음

2022. 7. 1.

 

 

『 영원장마 』

 A_o - BLUE SOULS



[ 유우즈 ]
하츠시카 유우지 & 모리나가 유우

 

더보기

 

이렇게 다시 여름을 넘어간다

유인



삶이라는 건 언제나 부조리했다. 그리 긴 삶을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런 식으로 굴러간다.
그래도 살아가야지 어쩌겠어. 비록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아침에는 잠깐 소나기가 내렸던 것 같기도 하다. 부검실의 창문은 높고 작아 제대로 기억 나지는 않는다. 요즘들어 들어오는 시신들은 한눈에 봐도 사유를 알기 쉽지만, 그 수가 점차 많아져 제대로 쉴 틈도 없다. 누군가에게 불평을 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해결해줄 사람도 없고. 이런 상황 속에서 부검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도 제 딴에는 의외네 싶은 생각도 있다.

그래도 무슨 일 인지 오늘은 꽤나 한가한 축에 속한다. 그간 일주일 동안은 집에 들어갈 수 있을지 부터가 걱정일 정도로 일이 밀려들었으니까. 끝이 다가오니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고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이렇게 다들 자신을 놓는거겠지.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유로 죽으려 하는 심리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꺼이 일을 하는 것 과는 별개로 생각이 많아진다. 오늘같은 날에는 더욱.

멸망과 죽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세상이 끝난다는 그 생각에 각자 어떤 죽음을 품고있는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먼저 손을 놓고싶은걸까. … 옛날이라면 주머니에 구겨져 있을 담배곽을 손에 쥐었겠지만 이제는 그 짓도 못한다. 대신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간식 상자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에 넣는다. 달달한 맛이 들어오니 어쩐지 기분이 풀리는 기분이라 상관없나, 싶어지기도 한다. 어차피 그들의 선택과 나의 선택은 상당히 동떨어져 있을 테니까. 내가 저 차가운 부검대에 올라갈 일은 없겠지. 내 죽음에는 그들과 다르게 별 다른 이유도 붙여지지 않을거다. 세상이 멸망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들이 심해에 영위할 때 까지.

그래 뭐, 그걸로도 충분하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 정도로는 내가 일상을 살아가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으니까. 어느새 입 안에서 초콜릿은 다 녹아내리고 조금은 씁쓸한 마지막 맛이 퍼진다. 창 밖을 바라보면 소나기가 내렸던가, 그렇게 빗소리를 닮은 노래가 들렸던가….



하츠시카 씨.

고막을 울리던 파동이 끊어지듯 오른쪽 귀에서 떨어져 나간다. 동시에 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난 청자가 관성처럼 그림자를 찾아 되돌아온다. 음악의 효력이 다하는 순간, 같은 선상에서 한 사람만을 오려낸 절단면이 느슨히 서로를 끌어당기듯 맞붙고 사이 존재하는 기억의 공백에 현재를 끼얹는다. 이어폰 줄이 당겨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끼어든다. 각각 눈 한 개와 한 쌍의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그는 할 예정이 없었던 말을 포함한 전부를 잊어버린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냉랭한 현실감. 계속 찾았는데, 그 감각을 결코 달갑다고 말할 수 없다면. 어디에도 안 계셔서…

차라리 가만히 두고 보기라도 해야 했다.

 


외전: 202초의 정적
화소

둥글게 만 손끝에는 담배 한 곽과 라이터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매끈한 비닐에 싸인 채 유성처럼 떨어지는 빗물을 밀어내고 있는 그것은 완전한 신품으로, 이미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은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게 뭐야? 몰라서 묻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간극의 표차가 너무 심했다. 유우지가 간혹 담배를 피우거나,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거나, 심지어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금연을 선언한 이후에도, 유우는 혼자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넓고 둘이 살기에는 비좁은 집의 베란다 구석에서 재떨이를 찾았을 때 그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빛 없는 곳에서도 이목구비를 따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그 그림자 끝에서 갈퀴 같은 손가락들이 뻗어나와 영영 그녀를 끌고 들어갈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녹아든 얼굴. 유우지도 안다. 그건 불신의 얼굴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그녀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전에 저도 피워보게 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하츠시카 씨가 주셨던 건 아니지만, 그때보다 덜 독한 거니까 괜찮을지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담배곽에서는 연초 향뿐만 아니라 과하지 않은 박하 향이 섞여 있었다. 눅눅한 공기 중에 괜히 향이 번지자 유우지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붙잡은 유우의 손을 내린다. 매캐한 향이 밸까 두렵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때 그녀가 그를 보며 느꼈던 기이한 불안감을 지금 그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런 건 또 왜 알고 있어.”
“에이, 저 편의점 알바 오래 했어요?”

물음표 끝에 힘을 주어 방점을 찍는 목소리가 천연덕스럽다. 모리나가 유우는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대하는 일이 능숙하며, 또 어디까지나 그 나이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정도였지만 정말 중요한 일을 묻어두는 데도 능통했다. 아주 오래 하츠시카 유우지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 사실을 알기에 뒤집힌 모래시계의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초조해진다. 인지는 이런 때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아서라. 연기만 맡아도 기침하면서.”
“이상하네, 왜 안 되지. 젖었나...”

그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유우가 입술을 만 채 어느 새 포장을 까서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다. 볼품없이 젖은 종이 끄트머리에서 불을 당기려 라이터를 키는 손짓이 반복적으로 헛돈다. 탁, 탁, 탁. 그제서야 유우지는 기이한 제안 속에 담긴 간극의 정체를 눈치챈다. 거추장스러운 생각이 걷히고 소음이 귓가에서 멀어진다. 하늘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를 쏟아내고, 버려진 별의 주민들은 모두 무기물이 되어 떠내려가는 세계. 탁, 탁, 탁... 악의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이십 년 동안 그 세계만이 변하지 않는 전부였다면. 아니,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가 오늘 멸망하는데,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을 그는 모른다. 비로소 퍼뜩 정신이 든다. 탁, 탁, 탁. 라이터를 켜느라 빨갛게 짓눌린 엄지를 본 순간, 둘 모두에게 아로새겨진 나쁜 기억은 빗물 먹은 몸을 견인하기 충분한 방아쇠다. 21세기판 부싯돌을 빼앗긴 유우는 허망한 표정으로 유우지를 올려다본다. 소유를 주장하듯 빈 손을 뻗었지만, 그 거리만큼 유우지가 라이터를 그러쥔 팔을 더 들어올린다. 어쩌면 뿌리치듯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감정적이라는 낱말은 편리하고 무책임하지만, 외로 그에게 주어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뭐 하게. 씹어뱉듯 말한다. 어디까지나 더 이상의 요구를 사절하기 위한 형식적인 물음에 지나지 않으니, 변변찮은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몇 번씩 달싹이던 입술이 꽉 닫히자 그는 내심 안도했지만, 문득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한 뒤 다음으로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 순간처럼 불안해진다. 적어도 다음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어렵게 벌려진 입에서 나온 말은 정당한 척 하는 이유조차 아니었다.

“……부탁이에요.”

비가 내린다기보다는 쏟아지고 있었다. 단순히 장대비나 호우라는 낱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우레 같은 소리. 가 고막을 한참 두드린다. 빗물과 맞닿는 자리마다 아프게 찔리는 듯한 감각. 유우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게 빗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저 안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귀가 멀 것 같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엉켜 있던 두 인영이 떨어지고 한쪽이 먼저 손을 거둔다. 숨을 삼키며 젖은 연분홍색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일단 들어가자. 예견된 패배다.



“그건 버려. 다 젖었잖아.”

유우지의 손에 이끌려 처마로 들어간 유우는 군말없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 바닥에 던져둔다. 더 이상의 저항은 필요 없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곧 유우지가 손을 뻗어 유우가 들고 있던 담배곽에서 멀쩡한 새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 익숙하게 한 손으로 바람을 가린 뒤 라이터를 당기자 불이 붙는다. 그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뒤 희뿌연 연기를 길게 뱉어낸다. 유우지에게 그 뒤로 말한 적은 없지만, 유우는 그 모습이 꼭 입으로 영혼이 드나드는 것처럼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멍하니 있는 유우의 입가에 쿡, 하고 무언가가 눌린다. 시선을 바로 했더니 그새 유우지가 새 담배를 하나 꺼내 그녀의 입가에 대 준 차다. 자.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아예 입에 물려준다. 불씨가 닿으면 필터를 빨아들여. 그래야 불이 붙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유우지가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아래로, 더 아래로. 성인 여자 팔뚝 하나 정도는 나는 기 차이 때문에 한없이 내려오는 순간이 좋다. 담배 끝에 불이 붙자 시키는 대로 깊이 빨이들이자 폐부에 매캐한 향이 고이고, 맹렬한 기침이 터진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볼에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거면 왜 했어?”
“이렇게 해야…”
“해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까.”
“뭐?”



“고등학교 때였나, 학교에서 들었는데요. 별 하나가 소멸하는 건 또다른 별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대요. 낭만적이죠.”
“허어.”
“실은, 시험에 나온다고 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거지만."
“산통 깨긴.”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세계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일직선상이 아니라 사실 동그란 하나의 띠 모양으로 되어 있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대학교 교양이었던가, 고등학교 시험 범위였던가, 그것도 아니면 레포트를 위해 찾아 읽었던 서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리나가 유우는 우선 자신을 담고 있는 것보다 큰 범주의 세계에 관심이 없고, 낭만 혹은 구성이라고 불리는 짜임새를 이해하기 원하지 않으므로 어떤 선택지도 마음이 끌려서는 아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억의 조각이 마음의 한 켠을 차지하고 물러서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시작은 끝. 끝은 시작. 처음으로 그에게 공포, 나약함, 애정을 전부 드러냈던 순간, 둥근 모양을 한 시간의 흐름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그가 멀쩡했던 건, 용케 그녀를 감싼 거대하고 다정하며 악의적인 불행의 손길을 피해갈 수 있었던 건 그 절단 때문이라는 어떤 종교적인 믿음. 그러니 세계가 멸망하는 지금, 운명이 어떤 수를 쓰지 않아도 반드시 그를 잃게 된다면 차라리 그 띠를 다시 잇고 싶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서, 현재가 미래가 되고, 다시 과거가 되도록. 당신과 내가 이 지점으로 되돌아와서…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게.
“거짓말.”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의 꽁초 부분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파삭 바스라지며 유우의 손가락 마디를 할퀴고 발치로 떨어진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것을 억지로 참는다. 한참의 간극 뒤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억눌려 있다.
“…… 진짠데.”
왜 안 믿어주세요? 그렇게 묻기 전에 먼저 유우지가 몸을 숙인다.
“손이라도 좀 어떻게 하고 말해라.”
유우보다 약간 서늘하고 한 마디는 큰, 마찬가지로 빗물에 푹 젖은 손이 미끈하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쥔다. 그제서야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다.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속에서 고열만 들끓는다.
“이제 티 안 나니까, …계속 해.”
그때 모리나가 유우는 세계가 결코 자신에게서 이 남자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이해한다. 그러니 이건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도. 머리카락에 맺힌 물이 뺨을 타고 흘러 턱끝에서 발치로 추락한다. 그 사이로 물이 아닌 것 역시 함께 떨어진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너도 나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 그는 스스로 직조한 명제를 떨쳐내듯 팔을 뻗어 불운한 연인을 끌어안는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표정은 찰나. 끌어당기면 전부 확인할 수 없게 되지만, 손안에 들어온 작은 머리통이 떨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명확하게 감각할 수 있다.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는 동안, 그는 시선을 어깨 너머로 가져간 자리에 때맞춰 있던 하늘이 얄밉도록 새파랗다는 핑계로 눈가를 찌푸린다. 두렵겠지. 잃으면 안 되는 걸 만들어 버렸으니까. 우리는 줄곧 이 순간을 기다리며 겁을 내 왔던 거야. 하츠시카 유우지가 빼앗긴 이어폰의 한쪽을 모리나가 유우에게 나누어 준다. 그런 세계도 있다.

 

 

その手を離してしまったなら
きっと もう取り戻せないはずなんだ
こうしてまた 春を超えてゆく
冗談のように 今日を忘れてゆく

錄音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날입니다. 여름의 끝자락.

당신은 어느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창공과 노을의 경계를 바라보며

낡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곡이 끝날 때 당신도, 당신의 세계도,

그 사람의 세계도 종말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