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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를 누비고 돌아온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종말을 맞이하는 여름 날의 추억이었습니다.

녹음의 녹음

2022. 7. 1.

 

 

『 이세계를 누비고 돌아온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종말을 맞이하는 여름 날의 추억이었습니다. 』

Lauv - Never Not



[ 그리핀도르의 붉음은 여름의 붉음이다 ]
일라이 L. 드레퓌스 & 므네모시네 I. 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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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므네모시네와 일라이에게 일어난 일 역시 그러했다. 평소처럼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다른 세계였다. 이게 무슨 소설도 아니고. 알게 된 계기도 어이없었다. 일어나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클리셰보다 더 클리세같은 현실이었다. 소독약 냄새가 아니라 다행인 건가. 현실을 부정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푸른빛 넥타이의 교복은 어디 가고 빨간색 넥타이가 있었다. 그래, 4가지 기숙사 중 한 곳에 배정받는 마법 세계 라이프가 펼쳐졌다는 이야기다. 믿어지는가? 사실 안 믿어져도 상관없다, 앞으로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 어떻게든 기숙사 밖으로 나와 상황을 확인한 므네모시네는 기절하고 싶었고, 일라이는 재밌어했다.

“…너 왜 여기 있어?”
“모네, 우리 여기서도 같은 반이네?”
“아니, 일단 우리가 같은 기현상을 경험한 게 문제 아니야?”
“돌아가는 방법 알아?”
“모르지…….”
“그럼 즐겨”

인싸 중의 인싸 일라이는 그렇게 학교를 뒤집어놨다. 특히 프롬 파티에서 보여준 그의 현란한 탭댄스는 –비록 두 사람은 알 수 없었지만- 전설 중의 전설로 남았다. 마법 세계가 익숙해질 무렵에는 또다시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역시, 이번에도 예고 같은 건 없었다. 이번엔 좀비가 나오는 세계였다. 눈을 뜨자마자 좀비를 마주한 일라이는 태연하게 총으로 헤드샷을 날렸다. 명중이었다. 총은 어디서 난 거야? 므네모시네의 의문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일라이, 이거 꿈 아니지?”
“(볼 꼬집음) 아닌 거 같지?”
“아”

 

 

다시 한번, 세계가 변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는데 한탄할 틈도 없이 직장인이 되었다. 제법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일라이가 흑막이 됐다. 멀쩡한 오피스 라이프 일상 세계인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세계 멸망이라니 이게 사실인가. 동료가 난데없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주범이라니 므네모시네는 현실을 두 번 정도 외면하고 싶어졌다.

 

“모네, 납작하게 캐해석 하지 마.”
“일라이, 너야말로 메타 발언하지 마.”

 

 

그 이후에도 세계가 바뀌는 일은 계속됐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세계를 여행했다. 어떤 세계에서는 일라이가 납치된 공주님 포지션이었는데, 므네모시네가 납치한 용 포지션이라서 억울해하기도 했고, “왜 그렇게 억울해하는 건데” 원래 지내던 세계와 비슷한 곳이라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아무 일도 없는 세계라서 평화롭게 디저트를 나누어 먹었다. 므네모시네는 종종 불안해했지만, 부러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한낱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라이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 물론, 일라이는 불안함을 느끼는 대신 모든 세계를 즐겼다. 세계여행가란 직업이 있었다면 그를 위한 직업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그러던 중에, 불현듯, 두 사람은 동시에 직감했다. 드디어 자신들이 지내던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익숙한 감각이 두 사람을 뒤덮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니, 마주한 건 은하수였다. 밤하늘 색 원단에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나는 우주를 건너, 그렇게 어느 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마주한 건……

“모네…”
“…….”
“세계가 망했는데?”
“그걸 오늘 날씨가 좋네, 같은 투로 이야기하지 말아줄래….”

 


잔뜩 낡아버려서 외벽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물들, 미처 완성되지 못한 철근, 시들어버린 나무, 메마른 식물, 마른 건 모조리 태워버릴 것처럼 내리쬐는 햇볕,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세계.

아무것도 안했는데 세계가 망했다.
여름이었다.

 

 

"아니, 이거 그렇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잖아."
"모네, 메타 발언이야."
"지금 그게 중요해???"

 

대체 왜 망한 거지? 좀비? 크리처? 이상기후? 전쟁? 대체 이유가 뭔데? 갑자기 신이 등장해서 세계를 멸망시켜버렸습니다, 같은 전개는 아닐 거 아니야. 므네모시네가 반쯤 정신을 놓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일라이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음, 이거 역시 상황이 별로인 거 같은데? 톡톡, 신발의 앞부분으로 땅을 가볍게 두드렸다. 단순히 저런, 인간이 모두 죽었습니다. 정도의 이야기로 끝나기에는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름을 알리던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음부터 들리지 않았고,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식물은 다 말라비틀어져서는 만지면 당장이라도 가루가 되어 사라질 거 같고……. 마치, 세계가 완벽한 종말을 마주하기 직전의 상황처럼 보이지 않는가.

 

“조금 움직여볼까?”
“…갑자기?”
“혹시 우리 말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다른 세계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러려나, 가볍게 중얼거리며 므네모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는 손을 내밀었고, 므네모시네는 익숙하게 그 손을 잡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났고,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두 사람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도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었는데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도 해의 위치가 똑같지 않나? 불어오는 바람의 간격이 일정하다. 고장 난 시계의 태엽이 헛바퀴를 도는 것처럼. 관성적으로.

 

이상하지? 이상하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 건 간판이 떨어져 나간 카페였다. 야외에 놓인 테이블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아, 여기서 커피 마셨었는데. 기억나?”
“차가운 라떼면 충분하다고 했었는데 모네가 내 입에 마카롱을 밀어 넣었던 것도 기억나.”
“그런 건 기억하지 마.”
“기억 못 하면 섭섭해할 거면서?”
“그런 건 좀 잊어도 돼.”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므네모시네가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곳은 서점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나, 여기서 너한테 되게 서러웠던 거 같아…….”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하… 맨날 나만 혼자 상처받지……. 왜 혼자 상처받는 건데. 입구는 건물이 붕괴하며 떨어진 돌에 막혀있었기에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머리 위에서 해가 반짝였다. 일정한 속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었다.

“세계가 멸망한다면 겨울일 줄 알았어.”
“왜?”
“보통 생명이 죽는 계절이라고 하면 겨울을 떠올리니까?”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다. 무도회장을 생각게 하는 인형의 집을 뒤로하고, 메마른 여름 냄새가 나는 종이비행기의 흔적을 보고, 반쯤 깨진 머그잔에 달린 총 모양 키링에 시선을 두었다가, 숲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은 곳을 지났다. 한참을 걸었으나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멸망한 세계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거 같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건 우리뿐인 거 같지…….”

 

 

세계의 끝.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두 사람이 다니던 학교였다. 다른 건물에 비해서는 멀쩡한 모습인 것이 꼭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내라는 것처럼 보였다. 운동장에 깔린 잔디는 한참 전에 바스러져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1층 신발장을 지나 계단을 한 층 한층 올랐다.

 

3층에 도착하면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교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들여다본 교실은 분명 한낮의 학교를 닮아있었는데도, 모두가 하교한 뒤의 학교를 보는 것처럼 쓸쓸했다. 교탁에는 휴대폰과 악보가 있었다. 앱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곡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2시에 멈춰있는 시계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들여다봤을까. 교실에서 하나의 휴대폰을 나누어 보는 게, 어쩐지 아주 오래전의 일상과 닮아있어서.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렸다.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건 11살부터였던가. 같은 중학교를 나왔고, 17살, 같은 학교에 진학하고, 같은 반이 되어 종종 등하교를 같이 하기도하고, 수행평가를 위해 방과 후에 남아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다. 어느 여름날부터는 같이 세계를 여행했다. 길 잃은 이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방황하는 이를 잡기 위해 달려보기도 했었다. 결국에는 길을 찾았고, 방황을 끝내고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지금. 수많은 세계를 지나왔음에도 전혀 자라지 않은 머리카락. 달라지지 않은 얼굴. 원래의 세계가 아닌 곳에서의 죽음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위기가 닥치면 바뀌던 세계. 그리하여 이전 세계의 흔적은 전혀 남지 않은 채, 마침내 종말이다.

 


직감하면, 해가 빠른 속도로 저물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시계가 숫자를 나타내는 대신 기괴한 문자를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노을이 지는 모습은 예쁘더라. 하얀 창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다 두 사람은 옥상으로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분명했으니까. 그대로 들어가 난간에 걸터앉으면 일라이가 휴대폰을 조작했다.

휴대폰에서는 낯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므네모시네는 시선을 돌렸다. 어느 날, 일라이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가 불러주었던 노래였던가.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함께 들었던 노래였던가. 온전히 자리할 곳을 잃은 기억은 갈피를 잃은 채 방황했다. 창공과 노을의 경계.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한 건물들. 모든 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듯 산산이 흩어져 별 무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일라이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그렇지?"
“…슬픈 순간도 있었지만, 되돌아보면 전부 나쁜 기억들은 아니었던 거 같아."
"나는 어떤 세상에서도 영원히는 못 살 거 같으니까, 이런 끝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잘 모르겠어. 많은 세계를 여행했지만, 끝이 찾아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서, 그냥… 이게 꼭 악몽처럼 느껴져“
"좋게 생각해. 악몽이 아닐 수도 있잖아. 여기가 종말을 해야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있잖아, 만약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거라면……,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어?”
“아마도.”
“그러면, 그럴 수 있을 거야.”
“그게 뭐야……”

하지만 결말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해가 저물었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름다웠던 이야기에도, 비극적인 이야기에도, 마법 같았던 이야기에도 온점이 찍혔다.

 


노래가 끝났다.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We were so beautiful
We were so tragic
No other magic
Could ever compare

錄音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날입니다. 여름의 끝자락.

당신은 어느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창공과 노을의 경계를 바라보며

낡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곡이 끝날 때 당신도, 당신의 세계도,

그 사람의 세계도 종말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