錄音
Top

End of Sea

녹음의 녹음

2022. 7. 1.

 

 

『 바다의 끝 』

악동뮤지션 - 물 만난 물고기



[ 벤타카 ]
이타카 & 벤

 

더보기

 


선원들은 그들이 바다의 끝을 찾아내었다는 사실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D-15. 한바탕 휩쓸고 간 폭풍의 잔해 속에 *



 D - 15. 세상은 끝나가고 있다. 세상도 태어남을 거친 생명이라 생각한다면 그 끝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까닭은 간단했다. 그 누구도 이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작별을 고하는 행성 따위를 누가 진지하게 상상했겠나. 몇 년 전 내륙을 강타했던 거대한 태풍이나 여러 기후 이상들이 지금의 이 순간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건 이 행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일 뿐, 보통 사람들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인 순간이었다. 모두가 겁에 질려 돌아다녔고, 비명과 한숨은 육지를 떠돌았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늘 그렇듯 희망을 찾았고 절망을 반복했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이고 공기마저도 피비린내가 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세상의 멸망 따위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초연한 사내가 있다. 기다란 금발을 등 뒤로 늘어뜨리고, 눈 절반이 가려지도록 깃털 모자를 꾹 눌러 쓴 사내는 다른 손엔 커피가 든 머그잔을 쥐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디 데이를 손끝으로 훑는다. 십 오일. 날짜를 가늠하듯 느릿하던 손가락이 이내 신문을 덮는다. 꾹 눌러 쓴 깃털 모자를 더 내리누르며, 사내는 거의 마시지도 못한 커피를 아까운 듯 내려다보다 테이블에 그대로 올려 두었다. 신문, 커피, 그리고 커피값을 가지런히 내려두며 사내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여름치고는 서늘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린다. 곧은 걸음으로 거리를 걸으면서도 사내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절망하고 빛을 잃은 낯들을 새기듯 눈에 담는다. 함께 멸망을 목전에 둔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감한 눈이나,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뭍에서 타인과 섞이지 않고, 반듯하게 걸어 도착한 목적지에서 사내는 고요한 낯이 무색하게도 목소리를 높인다.

 - 닻을 올리시오, 출항하겠소!
 - 예, 선장님! 목적지를! 

 커다란 목소리에 웃음소리가 섞인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육지의 소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제 앞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 선원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사내는 습관적으로 내뱉던 말을 입 안으로 삼킨다. 그것은 꽤 생경한 감각이었다. 세는 것이 의미 없을 만큼 많이 뱉어냈던 말을 삼키고, 지금에서야 다른 말을 고민하는 행위 자체가 말이다. 신중한 낯으로 잠시 말을 멈췄던 사내는, 이내 옅은 숨과 함께 정확한 목적지를 입에 담는다. 

 -  …우리는, 
 - ……. 
 - …미지未知로 갈 것이오. 키는 내가 잡겠소. 위치로! 
 - 예! 출항! 출항이다! 
 - 돛을 펴라! 

 그리고 그의 선원들은 늘 그렇듯, 그에게 의문 하나 내비치는 법이 없다. 그저 그의 말대로 돛을 펴고, 닻을 올리고, 적당한 바람을 탈 때까지 노를 잡기 위해 배 안으로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까지 그저 저들끼리 웃고 장난치며 발을 옮기기 바빴다. 그 모습을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은 사내는, 천천히 모자를 벗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서늘하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육지의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갈라지고 메마른 땅으로 느꼈으나 바다 사람인 그는 바람의 길과 온도가 바뀌는 것으로 느꼈다. 바뀌는 바람은 바닷길을 바꾸고, 달라진 바닷길은 아차 하는 순간 뱃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그것만큼 뱃사람에게 무서운 일은 없으나, 그럼에도 사내는 개의치 않고 웃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바람이 바뀌어 바닷길이 바뀌고 별의 위치가 달라져 그가 아는 바다를 모두 잃게 된다 해도, 절대 잊거나 헷갈리지 않을 단 하나의 길이 이미 사내에게 있는 까닭이다. 사내는 그저 잊지 않은 길을 따라 배를 돌리면 될 일. 바람이 바뀐다 한들 그것이 바람이 아니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날카로운 눈매를 가리던 모자를 완전히 벗어 근처에 대충 걸어 둔 사내는, 반듯하게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키를 잡았다. 범선을 이끄는 키는 무겁고 거대하다. 그러나 사내는 그 두꺼운 키에서 바다를 읽는다. 흔들림 없이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사내는, 이내 키를 돌린다. 그러나 온전히 담대하지는 못했으리라. 

 혹여 당신이 저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희망을 찾다 끝내 절망했을까.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익숙한 방향이었다. 그것이 문득 그리워 사내는 눈을 감았다.


D-6. 덩그러니 남겨진 마지막 작품 *



 평생을 바다와 함께 자란 사람들은 응당 바다에 관한 미신 한 두 개 쯤은 믿기 마련이다. 별을 보며 방향을 가늠하고 바닷물의 온도로 해류를 알며 새들로 육지의 방향을 알아채는 사람들이니 오죽하랴. 바다 사람은 바다의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을 모른 채 영원히 항해를 지속하는 유령선, 선원들을 미혹 시킨다는 세이렌의 노래, 저 먼바다의 문어 괴물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미신의 가짓수는 감히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삼 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이 자그마한 마을에서는 바이킹에 관한 미신을 최고로 쳤다. 죽음을 잊은 용감한 전사들, 두려움을 모르는 항로의 주인이자 바다와 함께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 진정한 바다 사람을 향한 존경. 마을 사람 거의 모두가 물질과 어업으로 삶을 이어가는 마을에서 이러한 믿음은 일견 당연할 것이며, 이상한 일조차 아니리라. 육지의 끝이며 바다의 시작인 듯 내륙에서 가장 멀고 바다와 가장 가까운 이 마을은 육지의 소식이 전해오기까지 삼 개월은 걸리니까.

 허나 이 마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또 있다. 바다의 미신도 미신이지만, 이 마을에는 미신을 상상으로 만드는 작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닿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땅에 관해 이야기를 쓰는 작가. 상상을 글자로 화化하는 재능을 지녀 남들과 조금 다른 바다와 함께 사는 이. 익숙한 바다를 내려다 보며 바람과 파도를 걱정하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새롭고 낯선 바다를 그려내는 사람은 어찌할 수 없게도 사람들 틈에서 튀게 된다. 순박하고 작은 해안 마을에서 남들과 조금 다른 바다를 본다는 것이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나. 

 이타카Ithaca. 신화 속 영웅의 탄생지를 필명으로 쓰는 이 작가야말로, 이 마을의 유일하고 영원한 미지未知일 뻔했다. 어느 사내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D
-4. 고독함이 머무는 파란 도화지 속에 *



 타인이 평생 상상조차 하지 않은 미지未知를 글로 써내는 것은 기실 쉬운 일이 아니다. 지구조차 하나의 땅을 만들기 위해 수억 년의 세월을 흘려보낸 마당에, 그 땅의 모든 것을 홀로 써 내린다는 것이 필멸할 인간에게 가당한 일이던가? 그러나 그 일을 이타카는 해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을 수평선 너머의 땅을 쉽게도 그려내었다.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릴 만큼 유명해지지는 않았으나, 평생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바닷가 마을과 그 부근에서 작가님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었다. 이타카의 글은 바다를 바로 코앞에 두며 살아온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상이 멸망을 향해 달려도 이타카의 삶은 그리 변한 것이 없었다. 멸망을 뼈아파 하기에는 그에게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마을은 이미 죽음에 익숙했음이 두 번째 이유였다. 바다와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 바다란 안온하면서도 변덕스러워, 천 번의 항해를 했어도 마지막 한 번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러니 이들에게는 세계의 멸망과 바다에서의 죽음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타카 역시 그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세상의 끝이 세어지고 있어도 이타카에게 어제와 오늘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내일도 그럴 테지. 오늘도 하루가 별다른 일 없이 저물었다. 세상의 멸망까지는 고작 오 일이 남았을 뿐이다. 이제 날이 지났으니 사 일이겠으나, 이타카는 그저 바다가 훤히 보이는 모래턱에 앉아 보드라운 흰 모래가 제 신발을 파묻는 꼴을 지켜보았다. 쏴아, 파도가 쳤다. 세계의 멸망이 다가오며 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깨끗하여, 보름달과 별이 역설적으로 환했다. 보름달이 저렇게 밝으면 길잡이 별이 보이지 않을 텐데, 지극히 바다 사람다운 걱정을 하던 때에. 

 그런 순간이었다. 그 범선이 나타난 것은.

  바다를 가르고 수평선을 넘어 정확히 이 해변을 향해 다가오는 범선은 적어도 이타카의 삶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배였다. 이타카는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게로 다가오는 미지未知를 보았다. 보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것, 일평생 보지 못했던 것, 그리하여 그가 항상 써 내렸던 것들이 실물이 되어 나타난 순간. 

 배는 일말의 소음도 없이 모래 해변에 멈췄다. 배를 쉬게 해줄 장소를 잃어가는 세계에서, 용케 배를 환영해줄 육지를 잘 찾은 배 치고는 고요한 것이 기묘한 까닭에, 이타카는 답지도 않게 낯선 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몇십분이 지나도 갑판에 사람 하나 오가지 않고 말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배를 보며 이타카는 이것이 그저 바람에 떠밀려 내려온 배일까, 짐작했다. 용케 침몰하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해 떠내려온, 바다의 무덤. 세상에 닥쳐올 멸망을 단편적으로 그려낸 세계의 축소판. 원래 이 배에 타고 있었을, 그러나 지금은 바다에 묻혔을 사람들을 위해 장례를 치러 주어야 할까, 그런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선 때에. 
 
 텅,
 갑판에서 밧줄이 내려진다. 

 그리고 사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고요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배의 아래, 보통 선실이 위치한 곳에서 작지만 왁자지껄한 목소리, 혹은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Live like the way we sing…* 끝이 뭉개지고 높고 낮은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잘 알아듣지 못할 그것을 발로 내리누르며, 어느 사내가 홀로 갑판에 섰다. 필시 밧줄을 던진 이는 그이리라. 그러나 그뿐, 바다 사람은 바다에서 죽어야 한다는 오랜 격언을 온몸으로 실천하듯 갑판의 난간에 주저앉은 사내가 이타카를 빤히 보았다. 푹 눌러 쓰고 있던 깃털 모자를 슬쩍 밀어 올리며 눈을 휘어 부드럽게 웃는다. 달을 등지고 있어 그 웃음이 낯익은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는 이타카가 사용하는 언어를 완벽히 되풀이하며, 단정하게 입을 연다.

 "타시겠소."
 "……."
 "그대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겠소." 

 약속을 지키러 왔소. 감히 꺼내지 못한 말이 바다 위를 떠돈 것을 하나는 알았고 하나는 알지 못했다.


D-4. 죽음이 어색할 만큼 찬란한 빛깔들 *



 그것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의 온갖 미신들을 섭렵하며 자라온 이타카에게도 퍽이나 기묘한 제안이었다. 바다를 가르며 홀연히 나타난 범선의 주인 되어 보이는 이가, 원하는 곳에 태워다 주겠다며 다짜고짜 밧줄을 내리는 꼴을 누군들 익숙하게 여기겠는가. 

 하지만 그 제안을 단숨에 미쳤다고 일축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사내의 말이, 눈빛이, 던진 밧줄이 더없이 진실하다는 것을, 이타카가 기민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눈 앞의 낯선 이는 허무맹랑한 말을 건넬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태워 주겠다는 것이다.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사기꾼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나흘 뒤면 세상이 멸망할 텐데 사기를 쳐서 뭐에 쓰겠소? 나는 그저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러 온 것뿐이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말이지. …이름은?"
 "……, 벤."
 "내가 원하는 것이 이곳을 떠나는 것으로 보이나?"
 "그 반대요."
 "……."
 "글을 쓴다고 들었는데."
 "오늘 갑자기 나타난 뱃사람이 알 리는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닿지 못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지."
 "……."
 "세상이 망하기 전에 한 번쯤은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소. 그대가 썼던 것이 정말 존재치 않는 곳인지."
 
 사내는 그저 그뿐이라는 듯, 제 할 말을 끝맺고 입을 다문다. 선택은 오롯이 이타카의 몫이라는 듯이. 그러고 보니 저 사내는 제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이름을 묻고, 상대를 재어보는 것은 오직 저뿐, 사내는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선택을 건네고 침묵한다. 그 사이에도 바다 끝에 내려진 밧줄은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다. 범선을 올려다보던 목이 아파 목덜미를 주무르면서도, 이타카는 저를 벤이라 소개한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이타카가 이 마을을 떠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멸망이 두렵지 않았고 이 작은 마을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적당히 행복했고 적당히 좋은 날들을 지나왔다. 쓰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쓸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니 감히 만족한다 말할 수 있으리라. 인생에 험한 파도나 기나긴 폭풍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생도 바다와 같아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래, 다시 줄이자면 이타카는 자신의 삶이 적당했다. 모가 나지도, 지나치지도 않아 그가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이타카는 천천히 모래사장을 가로지른다. 남들과 다른 바다를 겪어 왔기에, 바다와 함께 살면서도 이렇게 바다와 가까워지는 것은 몇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타카는, 이것이 몹시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처럼 걸었다. 파도가 부드럽게 모래사장을 적시고, 눈앞에 밧줄이 흔들거렸다. 이 밧줄을 타고 올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땅을 보게 된다면. 적당한 삶을 살아 적당히 행복했다 생각하는데도, 어찌하여 이 밧줄을 손에 쥐고, 고작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에 홀리듯 범선의 옆면에 발을 딛어, 바다를 벗어나 하늘로 오르듯 손에 힘을 주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우습게도 할 말은 없겠지만.  

 멸망으로부터 사 일. 결국 평생 알지 못하는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어느 작가는, 그 그리움에 데려다주겠다는 뱃사람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른다. 


D-2. 너는 꼭 살아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배를 타, 당신이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 걸리는 시간의 단위가 고작 몇십 시간이 아니게 된다 해도 더 이상 살아가는 세계가 같지 않아 낯선 곳 수많은 사람들 틈 사이 그 발자취에 당신이 완벽히 녹아 있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찾을 수 있었소. 신기하게도. 당신은 이를 알 필요 없지만.
 걱정 마시오, 세상의 끝은 찾을 수 없었으나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항로는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보지 못한 새 내 항해 실력도 꽤 늘었거든. 이제 폭풍우에 움츠리고 빗물에 미끄러지던 애송이 사라졌고, 당신이 주었던 검은 내 곁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오.


D-1. 내 이름을 기억해줘 *



 손을 잡아.
 바다의 끝 
 이 바다는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요. 
 어느 날 누군가가 세상의 끝이라 소리쳤던 곳에서,
 가장 잔잔한 바다가 당신의 곁에 있는 한,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세계의 최후까지 바다에 떠 있었던 범선이 침몰한다. 


D-0. 너는 바다가 되고 난 배가 되었네 *



 그리하여 우리는 깃털 모자 하나를 간신히 남긴 채, 영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 되리라. 

 

 

너는 꼭 살아서, 죽기 살기로 살아서 내가 있었음을 음악 해줘
그는 동경했던 기어코 물을 만나서 물고기처럼 떠나야 했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예언하듯이 살길
Live like the way we sing

錄音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날입니다. 여름의 끝자락.

당신은 어느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창공과 노을의 경계를 바라보며

낡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곡이 끝날 때 당신도, 당신의 세계도,

그 사람의 세계도 종말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