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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마녀들

녹음의 녹음

2022. 7. 1.

 

 

『 정원의 마녀들 』

Kalafina - 君の銀の庭



[ 사단법인마법소녀마스코트향우회총연합회 ]
이네사 오스발트 & 알렉산드라 카르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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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마녀들
오리아나



아마노자카 신도시의 하늘이 무지개 샤베트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음률이 꼬이고 있는 것이다. 이젠 어떤 마법도 이 세계를 구할 수 없었다. 완전히 불가역적으로 확실하게 끝장난 게임이었다.


  마법소녀 이네사는 이미 변신이 풀렸다. 벚꽃 레이스도 장미 리본도, 모란꽃 튀튀도 물에 푼 솜사탕처럼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흰 반팔 셔츠에 하늘색 리본과 스커트 교복 차림의 소녀 한 명이 꽃잎처럼 팔랑팔랑 떨어져내릴 뿐이었다. 

  유리와 철근 콘크리트로 된 건물 옥상 바닥에 내려선 이네사는 메리제인 구두 앞코를 톡톡 바닥에 두드렸다. 그녀가 아끼는 등교용 구두였지만, 어차피 곧 세계가 멸망하는 마당에 신발 에나멜에 기스가 좀 간들 문제될 것은 없었다. 분홍 리본이 달린 변신용 롯드를 손에 쥔 채로 소녀는 기지개를 켰다. 

 

  “아리사쨩, 이리 내려와! 다 끝났다구~” 

  마법소녀 아리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음사탕 드레스도 오래가진 않았다. 망사 장갑에서 눈송이 결정이 떨어져 나가고, 수정 구두는 깨지는 대신 물방울이 되어 발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굽이 살짝 높은 갈색 로퍼가 메리제인 곁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아리사는 오로라 빛이 감도는 흰색 롯드를 아쉬운 듯이 내려다봤지만, 롯드는 더 이상 휘몰아치는 눈보라나 거대한 얼음 미사일 같은 것들을 불러올 수 없었다.

 

  두 소녀는 옥상 난간에 기대 장밋빛에 잠기는 도시를 내려다봤다. 오랫동안 여름에 머물렀던 도시의 단말마는 후텁지근해서,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웅웅거리는 벌레 날갯짓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불꽃놀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네사.”
  톡톡, 롯드 끝을 손가락으로 쳐보던 아리사가 말했다. 롯드가 “그래요!”라고 맞장구치듯이 조그마한 루비듐 빛 불꽃을 뱉어냈다. 이네사는 그걸 보고 후후 웃었다. 

  “센코하나비 정도밖에 안 되겠는데! 그래도 좋아.”

  연분홍색 롯드에서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아리사는 롯드를 두 손 모아 가만히 들고 있었고—정말 센코하나비처럼 아래로 들고 있는 건 아니었다—이네사는 머리 위에서 붕붕 휘둘렀다. 금빛, 보라빛, 하늘빛…

 

  “아리사쨩이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기억 나?” 
  울려퍼지는 튜바 소리를 끊고 이네사가 말을 꺼냈다. 아리사는 듣고 있다, 는 뜻으로 파란 얼음 눈을 들었다. 이네사가 정말로 그녀의 기억이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꺼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리사쨩은 정말~ 얼음 공주님 같았어. 내가 떨어뜨린 안경을 주워주는데~안경테가 정말정말 차가웠다니까?”
  “그게 신기해?”
  “그럼! 아마노자카는 늘 더운걸. 안경테 같은 거, 미지근한 게 보통이구…가끔은 뜨거워지기도 해~”
  “그렇구나. 난 더워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  

 

  이네사는 히죽 웃었다. 그게 이 도시의 특별한 소녀들 중에서도 아리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점이었다. 아마노자카 시는 1년 내내 여름이었고, 아리사는 얼음의 마법소녀였다. 헬퍼 페어리 피코링이 아리사와 페어를 이루라고 했을 때, 이네사는 자랑스럽고 설레서 폴짝폴짝 뛰다가 들고 있던 컴팩트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말이지, 첫 페어 임무 때! 시계태엽 괴수랑 싸우는데 깜짝 놀랐잖아. 난 꽃의 마법소녀니까, 그 날은 활약할 일이 없겠구나~싶었거든. 생각해봐, 기계형 괴수인걸. 아리사쨩이 휙~하고 얼려버리고 팍! 하고 부숴버리면 끝이잖아?”
  “기계형 괴수가 아니더라도, 마력을 많이 쓰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아아무튼! 이네사가 강조하듯 높은 소리로 말하자, 휘두르던 롯드 끝에서 복숭아색 불꽃이 퐁 튀어나왔다.
  “그런데 아리사쨩이 중간에 날 불러서…태엽장치 파랑새랑 분침 바늘을 가져갈 수 있게 해줬어. 덕분에 마법 점수도 얻을 수 있었고, 데카트리나 여왕님한테 상으로 오백 엔도 받을 수 있었지~…”
  “기억 나. 그 날 하교길에 같이 타코야키를 먹었는걸.”
  “그래! 그거, 여왕님한테 받은 오백 엔으로 산 거야.”
  “지금 생각하면, 오백 엔은 여왕님이 주는 상금 치곤 좀 적은 것 같아.”
  “그야~우린 아직 중학생인걸? 너무 많은 돈은 잘못된 소비습관의 어머니라구~”  

 

 이네사는 선 자리에서 빙글 돌아 난간에 등을 기댔다. 하늘색 플레어 스커트의 치맛자락이 팔랑 흔들렸다. 그대로 고개를 들면,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 양갈래가 꽃불 타오르는 아마노자카 시 쪽으로 달랑거렸다. 보라색과 주황색, 금빛 젤리가 흘러다니는 하늘을 벚꽃색 눈동자가 올려다봤다.

 

  “응…그래도, 오천 엔이면 좋았을지도. 그럼 아리사쨩이랑 타코야키도 먹고, 남은 돈으로…흠!”
이네사가 말을 하다가 멈추자, 롯드에서 솟아나는 은빛 불꽃을 바라보던 아리사가 시선을 돌렸다. 
 “라키젠느의 한정 아이섀도?”
  “응~~~그거~~…”  
  하늘을 본 채로 이네사가 발을 달랑거렸다. 롯드에 달려있던 아크릴 챰과 오마모리 유리 방울이 부딪혀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아이섀도, 역시 중학생에겐 허들 높으니까~…고등학생이 되면 해보고 싶었어. 실제로 쓰진 않더라도 그냥…샀으면 좋았을 것 같아. 팔레트가 정말 귀여웠는걸!”
  “네사는 분홍색 꽃을 정말 좋아하니까.”
  “응! 완~전 옅은 분홍색에, 연두색 이파리가 조금 보이는 디자인. 디자이너들은 대단한 것 같아. 마법도 쓰지 않고 현실에 없는 꽃을 만들어내잖아.”

 

 이네사가 가지고 싶었던 코스메틱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그 동안 하늘에선 은빛 별가루가 튀겨져 팝콘이 되고, 무지개 유니콘의 갈기가 갈색으로 끓었다가 카라멜로 변했다. 
  종말의 음률은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찢으며 퍼져나가던 금관악기 소리가 조금 가라앉고, 오보에와 플룻 선율에 섞여 샤라랑, 하는 슬레이벨 소리가 방울벌레처럼 울었다. 꽃의 마법소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리사쨩, 아리사쨩은 하고 싶었던 거…”

 

  그 때, 갑자기 닌자가 등장했다.
  “마법세계의 배신자들! 여왕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정확히는 인법의 마법소녀 니니코의 등장이었다. 그 뒤로 청사과의 마법소녀 링링, 은박지의 마법소녀 시로네, 풍향계의 마법소녀 카자미가 차례차례 슈팟! 하는 소리와 함께 옥상에 착지했다. 이미 모두 변신이 풀려 있었으니, 마법소녀 드레스수트를 입은 아이는 당연히 없었다. 마법소녀 니니코가 검은색 롯드로 두 사람을 겨누며 외쳤다.

 

  “마법소녀 이네사, 마법소녀 아리사! 변명은 듣지 않겠어. 너희가 이 종말에 관계되었다는 건 전부 알고 왔으니까!”
  “그래 맞아!”
  마법소녀 링링도 청사과색 롯드를 겨누며 거들었다. 
 “시로네쨩이 전부 봤다구. 얼음 송곳이 영원의 크리스탈을 찔러버리는 걸 말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사쨩도 리사쨩도, 우린 믿었는데…!”   

  시로네가 훌쩍 눈물을 훔쳤다. 마법소녀 카자미는 차분하게 시로네의 어깨를 두드리고, 부엉이 뿔테 안경 너머로 결연하게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마지막 변명이 있다면 들어줄게요, 두 사람.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죠?”
 아리사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불꽃놀이를 하던 오로라 화이트 롯드를 꾹 쥔 채 그녀는 대답했다.
  “변명할 건 없어. 우리는 임무를 다했을 뿐.”
  “뻔뻔하게…!”

  마법소녀 링링이 분노해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청사과색 롯드엔 더 이상 조금도 마법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홧김에 롯드를 바닥에 던지며, 링링은 소리쳤다.
  “언제부터 여왕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을 듣게 된 거야?!”
  “됐어, 링링. 쓸데없는 질문은 필요없어.”

 

  마법소녀 니니코는 리더답게 시종일관 냉정했다. 검은 롯드를 교복 치마 아래로 집어넣은 그녀는, 닌가의 후예답게 은밀하고도 재빠른 폼으로 스텝을 밟으며 아리사에게로 주먹을 내뻗었다.
  “4대 2야. 배신자는…”
  “세상이 종말하더라도, 섬멸할 뿐!”

 

  아리사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동시에, 뒤에서 튀어나온 이네사의 왼손이 니니코의 주먹을 막아냈다. 이어 오른주먹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니니코의 코를 강타했다. 링링과 시로네가 동시에 아리사를 쫓아 뛰어올랐다. 아리사의 로퍼 굽이 옥상 루프탑을 캉, 캉 때리며 올라갔다. 
  “비겁하게 도망가는 거야?! 거기 서!”
  “도망가지 않아.”


  아리사는 휙 몸을 돌려 쫓아올라온 링링의 발목을 걷어찼다. 균형을 잃은 청사과의 마법소녀가 비명 소리와 함께 루프탑을 굴렀다. 시로네가 흠칫 놀라 굳어버린 사이, 그녀의 은발을 흰 장갑 낀 손이 걸머쥐었다. 꺄악! 두 번째 비명 소리와 함께 작은 몸이 인정사정 없이 루프탑의 경사진 지붕에 패대기쳐졌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옥상 난간 너머로 날아가, 그대로 여름 벌레가 우는 도시로 떨어져 갔다.         

 

  “시로네쨩!”


  발목을 쥔 링링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한편, 니니코는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이 일어서 이네사의 주먹을 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각이어서 조금도 다른 소녀들을 신경쓸 틈이 없을 텐데도, 니니코는 카자미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카자미상, 나는 괜찮으니 링링 쪽을!”
  “맡겨주세요.”
  카자미는 토파즈 색 롯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녀의 운동화가 빠르게 콘크리트 바닥을 가로질러 루프탑 쪽으로 향했다. 
  “여유있네, 니니쨩. 역시 리더는 다른 걸까?”
  “이네사…”

  두 소녀가 한동안 서로 마주보았다. 니니코의 검은 눈이 생글생글 웃는 분홍 눈 소녀를 응시했다. 언제든 훅을 날릴 수 있게 스텝을 밟던 이네사가 물었다.
  “우리를 섬멸한다는 거, 정말 니니쨩의 생각?”
  “나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거짓말. 니니쨩, 싫은 숙제를 할 때랑 똑같은 표정인걸.”

 

  니니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네사의 라이트 훅이 뺨에 꽂혔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니니코의 반대쪽 뺨을 보드라운 손가락이 휘어쥐더니, 그대로 붙잡아 흰 삭스를 신은 무릎을 향해 내리꽂았다. 두 번째로 코를 맞고 완전히 넉다운 된 니니코의 허벅지 밴드에서 검은색 롯드를 빼내 살펴보며 이네사는 말했다.  

  “유감이야, 니니쨩…마력이 남아있었다면 고쳐줄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우리 모두 이제 마법소녀가 아니니까.”

  발끝으로 의식을 잃은 링링과 카자미를 밀어 떨어뜨린 아리사가 루프탑에서 내려왔다. 이네사는 메리제인 구두를 벗고, 무르팍에 빨간 피가 묻은 양말을 벗고 있었다. 맨발꿈치로 빙글 돌아 아리사를 보며, 이네사는 속삭이듯이 맞장구쳤다.

  “맞아, 아리사쨩. 모두 끝내버렸지.”

  아리사는 긴 머리를 묶어올린 물빛 리본을 풀었다. 육탄전에 헝클어졌던 포니테일이 어깨 위로 밤의 커튼처럼 흩어져 내렸다. 피묻은 니삭스를 던져버린 이네사가 아리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 소녀는 마주보고 빙긋 웃었다.

  “머리, 다시 묶어줄게.”

  음악은 종장으로 치달아갔다. 태엽이 풀어지고 테이프가 늘어지듯 음이 두꺼워졌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하늘이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쪼개졌다. 구멍 사이로 거대한 흰 손이 나타나, 정원가위로 빌딩들을 마구 잘라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고 싶었던 일.”
  아리사가 불쑥 말했다.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었어.”
  “눈? 아리사쨩의 롯드에서 나오는 거 말야?”
  “응. 그건 원래 롯드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거거든. 아주 많이 내리면 온 세상을 하얗고 차갑게 만들어줘.”
  “멋지겠다~…”

  이네사의 고개가 툭, 아리사의 어깨에 얹혔다. 그녀가 새로 묶어준 리본이 안경 위로 드리워져, 이네사는 손가락 끝으로 살짝 치웠다. 
  “아이섀도 팔레트보다 훨씬 멋져.”
  “내가 이겼네. 분하니?”
  “아아니.”
   벚꽃색 눈이 부드럽게 깜빡였다.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짓는 것은 이네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둥글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깨진 하늘을 향했다. 
  “새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거, 알고 있는걸. 모든 것이 앞으로 굴러가고,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이 오는 세계.”
  “그때 나도 아리사쨩이랑 같이 보면—”


  이네사는 말을 멈추었다.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깔고 듣던 아리사가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샌가 종말의 음악이 끝나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피와 먼지가 묻은 교복을 입고 있었고 콘크리트 옥상은 후덥지근했지만, 세계는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하늘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두 장이 팔랑팔랑, 이윽고 조금씩 점점이, 너무 많은 빛이 뒤섞여 혼탁한 하늘에 칫솔로 새 물감을 뿌리듯이 팔랑, 팔랑 꽃잎이 내렸다. 이네사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에 닿은 꽃잎은 차가웠고 금세 녹아 물이 되었다. 이네사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눈이야 이거, 아리사쨩!”
  “그러게, 눈이네.”
  아리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그런 그녀도 뺨에 딸기색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맞았다. 시원하고 서늘했다. 불타올랐던 도시가 이제 식어가고 있었다. 이게 정원가위를 든 손이 말했던 <가을>일까? 이네사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니, 가을은 여름보다 하늘이 더 파랗고 높고 청과도 나무도 붉게 물든다고 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겨울이 왔구나.”

  이네사는 기쁨에 차서 중얼거렸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금세 콘크리트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이제 모든 색이 섞여 완전히 검은 색이었다. 그래도 발밑에선 은세계가 두 소녀를 비추고 있었다. 

 

 


  겨울의 귀부인 알렉산드라 카르핀은 모형정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정으로 천장을 짠 모형정원 안의 빛이 완전히 꺼지면, 그 정원은 다시 돌보지 않아도 되었다. 흐린 별처럼 명멸하던 은빛이 다하는 순간을 목도하고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며 살짝 흘러내린 숄을 추슬렀다. 때마침 현관의 황동 벨이 딸랑 하고 울렸다. 동거인의 귀환을 알리는 소리였다.

  “알리사, 미안~ 좀 늦었지. 보던 거 꺼졌어?”
  “응, 방금 끝난 참이야.”

  색안경 뒤로 연분홍색 눈을 감춘 마녀가 식료품이 든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후드를 벗었다. 어깨로 살랑 쏟아져 내리는 아마빛 머리카락 역시 검푸른 머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살짝 성질이 급한 구석이 있는 마녀는 머리띠 채로 가발을 붙잡아 아무렇게나 훌떡 벗어버렸다.  

  “어디어디, 좀 볼까…”

  귀 아래에서 잘린 흑발을 손가락으로 빗어내며, 한때 봄의 요정이라 불렸던 마녀 이네사가 모형정원 쪽으로 향했다. 사실 정원“들”이라고 하는 편이 맞았다. 알렉산드라가 앉아있던 의자 주변에는 수많은 정원들이 제각각 책상이나 선반에 놓여 은은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불 꺼진 정원을 가리켰다. 이네사는 외출용 장갑을 벗어 바구니의 빵들 사이에 끼워넣으며 정원을 들여다보았다. 
  “어라, 이거...”
  흰 손이 캄캄한 유리상자 안으로 들어가 휘저었다. 손가락 끝에는 설탕처럼 고운 가루가 묻어났지만, 꺼내볼 즈음에는 녹아 있었다. 다른 편 손으로 색안경을 내리며, 이네사는 손가락에 묻은 물방울을 쳐다봤다.

  “별일이네. 또 성에가 껴 있어.”

  크흠, 하고 알렉산드라가 작게 헛기침했다. 이네사는 자신의 패밀리어를 돌아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급히 덧붙였다.

  “아니!! 그렇지!! 아니 땐 굴뚝에 성에가 갑자기 낄 리는 없겠지?! 하핫 나도 참~ 우리 아가씨의 필드가 열려있는 줄도 모르고~타하핫! 나이들면 이게 문제라니까!”
  “당황하면 학창시절의 이상한 말투가 나오는 건 여전하구나.”
  “미안! 미안! 너무 작아서 거의 안 느껴졌단 말야~...”

   이네사는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며 모형정원 하나 분의 필드를 닫았다.(필드를 닫는 데 그 동작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가져온 빵을 썰고 버터와 무화과와 체리 잼을 덜어놓고 차를 끓여 데운 우유와 함께 내놓는 것까지 이네사가 자처해서 전부 했다.(알다시피 알렉산드라가 그녀보다 훨씬 빠르게 잘 하는 일이었다.)
  정확히 반으로 잘린 바삭한 껍질의 브뢰첸을 각자의 접시 앞에 두고, 미지근한 우유가 어느 정도 빈 속과 분위기를 덥혀줬을 때 이네사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모형정원에 필드는 왜 연 거야?”
  무화과 잼을 뜨던 알렉산드라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답할 말을 고를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눈이 보고 싶다고 그 애들이 그랬어.”
  “그 애들?”
  “있잖아. 우리가 정원에 보내는 사역 인형들.”
  “아아…”
   체리 잼이 발린 빵을 바삭 베어물며 이네사가 끄덕였다.
  “가끔 그럴 때가 있어. 인형들이 말하는 게 들릴 때.”
  “그럴 때 <알리사> 인형은 꼭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해.”
  “주인을 닮는 모양이지.”

  식사는 이어졌다. 이제는 봄의 요정이란 애칭도, 만년청춘의 마녀라는 위명도 버린 봄의 마녀와 겨울의 귀부인이 이 작고 따뜻한 고장의 저택에 사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속은 기적과 모순이 가득한 모든 세계에 미치고 있었다. 정원수의 가지를 하나하나 은가위로 손질하듯 정성들여 마법을 쳐내고 깎아내다 보면, 결국은 단 하나의 법칙에 따라 세계는 앞으로 굴러갈 것이었다. 

  하지만 남은 정원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그 전에 카르핀 령에 한 번 가자고. 설원의 풍경을 그리며 두 마녀는 차를 마셨다.    


마음의 종말
담랑



"미안."
"아냐, 오자고 한 건 나였잖아."
"하지만……."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 노란 볕은 세상을 온갖 강렬한 색채로 물들였고, 열기를 머금은 생물들은 지독한 존재감으로 후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폭력적으로 생장하는 생명들 속에서 알리사는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짧은 유년기를 지낸 한적한 교외를 기억하고 있었고, 드물게 자신의 얘길 할 때엔 그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덜 치열했던 시기로 규정하곤 했다. 알리사의 이야기 속에는 늘 푸르게 숨 쉬는 언덕이 있었고, 흔들리는 풍경과 나무, 해가 지면 장막처럼 캄캄해지는 마을 위로 점점이 빛나는 별이 있었다. 이네사는 언제부턴가 본 적도 없는 풍경을 그리워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낯선 이름들이 빽빽한 노선표 위에서 낡은 지명을 발견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재개발이라거나, 정권의 선전을 위한 대대적인 개발사업 규제 완화 같은 건 소녀에겐 어려운 얘기였다. 기관의 불허 결정과 조합의 해산, 흐지부지되어 황무지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개발 현장 따위는 더욱 그랬다. 뻣뻣한 교과서와 휴대폰의 액정, 바쁜 어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세상의 대부분인 아이들에게, 허락된 거라곤 고작 그것뿐인 소녀들에게,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란 건 일어나지 않은 일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럴 줄은 몰랐어."

어쩌면 종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알지 못한 채 사라진 모든 것들처럼. 잡초가 돋아나고 광열에 녹아가면서…….

"이렇게." 방치된 땅에 무성하게 돋아난 풀이 수군거렸다.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어."

 

알리사는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은 임시정류장에 서서 누런 흙빛으로 뒤집어진 땅을 바라봤다. 담담한 어조에 이네사는 속이 상했다. 가진 것이 없고 머리가 나쁘면 운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지?”

그 말은 바보같다. 어른들을 따돌리고 제 발로 학교를 뛰쳐나온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가방을 쥔 알리사의 손이 꼼지락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할 때에 드러나는 버릇이라는 걸 이네사는 안다.

 

“돌아가자.”
“어디로?”
“…….”
“…….”
"집으로."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황량한 가슴을 휩쓸었다. 결국 그곳뿐이다. 꼬박 반나절을 움직여 떠나온 곳에서, 고작 하룻밤을 보낼 수가 없어서. 굳은 결심도 한순간의 충동도 차가운 밤의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다. 벽과 지붕, 몸을 누일 곳과 이불을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보호받아온 아이들은 평상 하나 없는 황무지에서 밤을 보낼 방법 같은 건 모른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다.

 

다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알리사는 검고 긴 머리채를 걷어 귀 곁에서 붙잡았다. 수수한 분홍색 손톱에 저물어가는 해의 금빛이 깃들었다. 턱 아래를 간질이는 자신의 곱슬머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이네사는 그 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있잖아, 난 종말이나 재앙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너처럼 예쁜 애가 사라지는 건 손해인 것 같아…….

 

 

 

두 여자아이가 학교를 떠나 낯선 길에 몸을 맡긴 건 그날의 정오 무렵이었다.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저지르는 건 허탈할 만큼 쉬웠다. 범인류적 위기를 앞둔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 때론 신의 품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느라 손을 잡고 달리는 두 여자애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규명할 수 있는 세계의 거리란 건 낯선 버스를 타고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쉽게 멀어졌다. 해가 차츰 기울어지기 시작했을 때 이미 학교는 지평선 너머로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길을 걷고 버스를 갈아타고, 긴가민가한 눈치로 정류장에 내려 매연을 뿜으며 떠나는 차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실망과 한숨을 묵시한 소녀들은 이제 길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간다. 떠나오는 길이 그랬듯 돌아가는 길이 외롭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얘길 들뜬 척 떠들어대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휴대폰을 꺼내어 시답잖은 사진을 보여주고 이어폰을 꺼내어 꽂아주다보면 잦아들 줄 모르는 더위가 성가시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터리보다도 이야깃거리가 먼저 떨어져, 쓸모 없어진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다보면 잊고 있었던 허기가 차츰 부피를 키워갔다.

 

거친 흙길이 까만 에나멜 구두를 더럽혔고 이마와 목덜미는 땀이 배어 나오다 식는 것을 반복해서 찝찝했다. 한여름의 동행은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처럼 화창하지 않았고, 싱그러운 풀 냄새로 가득하지도 않았다. 땀을 훔쳐내는 것을 포기하자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눈에 스며 따가워졌다. 눈을 비비려 눈가에 손을 대면 손끝마저도 후끈해서 짜증스러운 마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네사는 안경을 몇 번 벗어 눈을 비비다가 잠시후엔 안경케이스를 찾아 가방을 뒤졌지만, 알록달록한 스티커로 장식된 케이스가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오도카니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힘이 쭉 빠진 채 옆을 바라보면 알리사가 앞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걷힐 때마다 보이는 관자놀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지만 내딛는 걸음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일정했고, 부산하게 땀을 훔치거나 가방을 올렸다 내렸다 하지도 않았다. 이네사는 모든 '숙녀다운' 것은 그의 몫이었다는 걸 기억해 낸다.

 

알렉산드라. 알리사, 혹은 슈라. 어른스럽고 차분한, 화내지 않고 채근하지 않는 우리의 학급반장. 누구나 그 애를 좋아하고 동경한다. 물론 차가움마저 느껴지는 단정함에 반감을 느끼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 애를 향한 험담을 직접 들은 적도 있다. 이네사, 걔 기분나쁘지 않아? 알렉산드라 말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않고. 못 들은 거 아냐. 코앞에 대고 말했어. 왜 내가 성가시게 굴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넌 걔 편이구나…….

……넌 걔 편이구나.
그게 아냐. 그때 이네사는 부정해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아냐, 나는 그냥 그 애에게 조금 미안해. 그도 그럴 게, 알리사는…….

 

“괜찮아.”

 

이네사는 어느새 자신의 걸음이 멈춰있다는 걸 깨달았다. 곧은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낭패감에 어깨가 굳었고, 상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네사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했다. “으, 어응….?” 알리사가 파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사과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어서.” 

 

사과?

 

멈춰 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떨어졌다. 드문드문 땀을 식히던 바람마저 잦아들자 작열하는 고요가 찾아왔다. 멀리 들리는 매미 소리, 술렁거리는 나뭇잎, 열기를 머금은 땅…….

"그게 아냐, 알리사." 침묵이 걷히고 다시 바람이 불었다. 알리사의 긴 머리채가 흔들렸다. 정수리 위에 떠있던 해가 더 가파르게 기울어지고 공기의 결이 갈라졌다. 종말을 향해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중에도 하루는 꾸준히 저물었다. "나는 그냥……." 말을 끝맺지 못해도 알리사는 고개를 기울이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손아귀에 땀이 맺혀 가방을 쥔 손이 미끄러웠다. 변명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렇대서 우리의 해묵은 사정 같은 걸 꺼내기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이네사는 대책 없는 탈출을 감행할 만큼 어렸지만, 어떤 심상은 풀어낼 시도조차 않는 게 낫다는 사실을 알 정도는 성숙했다. 사실을 말할 수도, 적당한 변명으로 둘러댈 수도 없어 방황하던 시선이 문득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에 닿았다. 한 마리 새가 구름 사이로 튀어나오는 모습이 어떤 충동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게 이런 풍경일 것 같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기로 약속했다. 슬픈 말 같은 건 나누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견디고 있는데, 견뎌야 할 것을 늘리는 짓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네사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놀라 당황한 눈으로 알리사를 바라봤을 때,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한 낯빛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네사는 실망했다. 하지만 실망감과는 다르다. 그건…….

그건 이상하다. "오늘 네가 당번이야."와 "우리는 이제 다 죽는구나."라는 말은 같지 않다. 둘은 달라야 한다.

불어오던 바람이 더욱 가파른 기세로 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흰 소매와 푸른 치마가 거세게 펄럭거렸을 때, 이네사는 문득 태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새카만 몸체로 뒤덮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종말이 땅보다도 태양을 먼저 삼켜버렸을 리는 없다. 구름을 헤치고 존재를 키워가는 그것은 이글거리는 태양 보다 미약하고 한낮의 별 보다 냉엄했고, 명백히 이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지 않기도 힘들다. 황무지 같은 땅에 땅 붙이고 정수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건 둘뿐이니까.

 

검은 헬리콥터가 하늘을 헤치며 가까워진다. 이네사가 그 모습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건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너는."
알리사, 나는 궁금해.
너는 생애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나여도…….
"그래도 괜찮아?"
뺨을 찢고 귀를 수없이 쳐올리며 다가오던 헬리콥터 소리가,
"응, 이네사."
멈춘다.
"난 괜찮아."

 

'그것'을 가리키는 단어는 다양하다. 정지, 부동, 동결,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그 근원의 불분명을 해명하지 못했고, 명확한 건 하나뿐이다. 이능력기구가 필사적으로 찾는 이능의 힘이라는 것.

프로펠러의 회전도 없이 허공에 멈춘 헬기의 모습은 잘못 붙여진 스티커처럼 보였다. 보호구를 착용한 사람의 모습이 강화유리 너머로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이네사는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망치는 우리를 향해 손 뻗던 사람들처럼, 절박한 원망이 섞인 눈을 하고 있을까? 불가해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일까? 이해할 수 없고 그럴 여유도 없고, 그래서 흉측한 것을 바라보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있잖아, 알리사. 어쩌면 넌 정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궁금해.
그 '괜찮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
왜 나와 함께 도망쳤어?
왜 내 손을 잡았어?
왜…….

 

 

"왜 그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았어?"
"……."
"선생님이 말했잖아. 초능력자들이 힘을 모으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네가 내 손을 잡았잖아." 알리사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네사는 답답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 힘이면 이제 우리 집에서 군식구 노릇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내 행동을 낱낱이 살펴보고 우리 엄마에게 얘기하는 일 같은 거, 귀한 집 철부지 딸의 모범이 되는 일 같은 거, 네가 원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과 바라 마지않았던 모든 일들, 어쩌면, 네가 수많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나와 같이 있지 않아도 되잖아! "그치만 나."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어."

짧은 순간 세상이 멈췄다.
불평하지 않는 알렉산드라. 알리사, 또는 슈라. 어른스럽고 차분한, 화내지 않고 채근하지 않는, 욕심도 불평도 없어 웃지 않는 우리의…….
이네사는 밀려오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눈물이 차오르더니 삽시간에 떨어졌다. 나도. 언어조차 되지 못한 말들이 방울방울 맺혔다. 너도 그랬구나. 슬픔을 참고 있었구나. 왜 그랬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내게는 할 수 있었잖아. 나밖에는 없었잖아.

 

알리사는 노을빛을 담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세상을 거꾸로 굴절시키며 턱 끝에 아롱져있던 눈물이 마른 땅 위로 떨어졌다. 알리사는 난처해졌다. 눈물 같은 걸 보려던 게 아니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들을 붉힌 낯으로 보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네사는 울음을 터트리고 세상은 시시각각 종말로 기울어진다. 그제야 깨닫는다. 그렇구나. 내가 또 침묵해야 할 때를 알지 못했구나. 하지만 꾸며진 교정에서 넌 행복해 보였잖아. 그래서 망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살기 위해서 견뎌야 할 모든 것들이 싫다고 말할 수 없었어. 그건 마치…….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같이 도망쳐달라는 것 같잖아.
그런 구차한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사과를 해야겠다. 그런 걸 바란 건 아니니까. 가방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던 알리사는 문득 흙을 얕게 적시는 물기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네사, 너……." 하지만 놀란 목소리는 덥고 익숙한 체온에 덮여 사라졌다. 가쁘게 박동하는 소리와 떨리는 호흡이 그의 모든 세상을 채웠다.

 

산등성이에 걸쳐진 해의 붉은빛이 피처럼 뻗쳐왔다. 헬리콥터의 검은 몸체 위와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의 사이사이, 맞닿은 살갗과 감은 눈의 속눈썹 가닥가닥마다 해의 비명이 닿았다. 이네사의 눈물이 닿은 땅으로부터 돋아난 풀잎이 흐드러져 발목을 간질였다. 알리사는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생장, 봄, 재생과 유지, 그 어떤 단어도 그 근원의 불분명을 해명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처음부터 해명 같은 것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알리사는 자신을 덮쳐온 작은 품에 안겨 귓가에서 정신없이 고해지는 선언을 들었다. 알리사. 응. 나도 돌아가기 싫었어. 그랬구나. 학교 다니는 것도 싫고 선생님이 날 곤란한 것처럼 쳐다보는 것도 싫었어. 네가 불려가는 것도 싫었어. 소리 지르고 화내고 싶었어. 집에 가기 싫었어. 그랬구나, 그래. 응. 그래서…….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상관이 없어? 상관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지 말자, 우리.

 

알리사는 이네사의 등을 도닥이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맞췄다. 눈물 젖은 분홍색 눈이 뜻밖에도 또렷한 빛을 띠고 그를 바라봤다. 이네사는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알리사가 소리 없이 웃고 그 머리 위에 옆얼굴을 맞대었다.

 

그래, 그러자.
돌아가지 말자.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 세계를 위해 애쓰는 건 그만두자.

 

 

静かに寄り添って
何処にも行かないで
窓辺で囀って
何処にも行かないで

錄音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날입니다. 여름의 끝자락.

당신은 어느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창공과 노을의 경계를 바라보며

낡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곡이 끝날 때 당신도, 당신의 세계도,

그 사람의 세계도 종말을 맞이합니다.